왜 쓰는지

2022년 9월
왜 쓰는지

스물 한살 때, 내가 처음으로 쓴 단편소설을 읽은 부모님이 거실에서 나누시던 대화가 기억이 난다. 그때 나는 방문을 닫고 잠이 들려는 찰나였는데, 방에서 그 대화가 들린다는 사실을 두 분은 모르는 듯 했다.

“내용이 없잖아.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게요.”

나는 수치심을 느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이런 비평은 처음이 아니었다. 일곱 살 때(만 나이로는 다섯살 반 밖에 되지 않았다) 나는 국민학교의 첫해를 어렵사리 보내고 있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그날 선생님은 반에서 제일 똑똑한 동급생 량희에게 일기 검사를 맡겼다. 량희는 교탁 앞에 자기 책상을 옮겨서 앉은 다음 친구들 일기를 하나하나 읽고 돌려주기 시작했고,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량희가 말했다.

“정현이가 쓴 일기는 재밌어.”

나는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근데 너무 길어. 이야기가 이것저것 너무 많아.”

그때 나는 나를 지키는 말, 예를 들면 “어쩌라고?” 같은 표현을 쓸 줄 몰랐다. 나는 역시 수치심을 느꼈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일기장을 돌려받고는, 한동안 너무 길어지지 않도록 의식하면서 일기를 썼던 기억이 난다.

대학입학 첫학기에 한국철학의 이해라는 수업을 들었다. 16세기에서 17세기 조선 유학자들의 사상적 계보를 다룬 수업이었다. 학기 중반에 수업 내용과 관련된 자유 주제로 글을 써내는 과제가 있었다. 북인들의 사상적 접근이 임란 후 유성룡의 경세론과 어떻게 관련이 있는지에 관해 써서 수업 조교에게 이메일로 보냈다. 덩치가 꽤 커서, 강의실 앞에 앉아 강한 존재감을 풍겼던 조교로부터 답장이 왔다.

“본인이 쓴 것 맞습니까?”

학부생이 썼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 조교의 논지였다. 사실 약간 기쁜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글을 잘 썼다는 이유로 표절 의심을 받는 처지에 놓이는 것은 유쾌하지 않았다. 2007년에도 무료 표절검사 도구는 있었다. 수치심에 약간의 좌절감이 보태졌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부모님의 베갯머리 비평을 듣고 얼마 뒤의 일이다. 픽션에 도전할 자신이 없어서 잠시 언론사에 대학생 기자로 활동을 했다. 나는 연말에 그 언론사로부터 우수기자상을 받았다. 활동이 끝나고 대학생 기자들을 담당했던 선배 기자가 말했다.

“네 글은 저널리즘도 아니고 문학도 아니고, 하여튼 애매해.”

그 즈음 나는 ‘어쩌라고’의 용법을 충분히 이해할 만한 스물 세살의 나이였다. 그러나 여전히 말문이 막혔다. 부끄러웠다.

누군가의 말을 듣고 부끄러움을 느끼면 사람은 대개 변한다. 자기 행동을 평가하는 사람들로부터 부끄러움을 느낄 줄 모르는 사람이라면 잘 변하지 않겠지만. 백일장에 낸 것들도 아닌데, 툭툭 떨어지는 날카로운 말들은 더 나아가려는 열정을 꺾을만큼 아팠다. 내가 틀려서 부끄러운 게 아니라, 가장 흉한 모습을 들킨 것처럼 부끄러웠다.

어느 순간 무언가를 포기하게 되는 과정에는, 대개 다른 사람의 말들이 나의 약한 부분을 건드리는 사건들이 개입되곤 한다. 나는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은 글을 쓰는 동안에도 그런 일들을 많이 겪었던 것 같다. 물론 앞서 언급했던 일화에는 내 행동에 잘못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이외에도 부끄러워서 그만둘뻔 한 순간들이 두 손에 차고 넘친다. 부끄러운 순간들이 쌓여갈 때, 보통이라면 나는 바뀌어야 했다. 그러니까 남들이 별로라고 하는 건 그만 두고 말아야 했다.

그런데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기이한 일이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쓰고 있다. 이 정도면 반항심이 아니라 반사회성 정도가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다.


글쓰기만이 갖는 이점이 두 가지 있다. 우선 쉽다. 늘상 쓰는 말을, 펜이나 컴퓨터로 옮기면 글이 된다. 글쓰기는 어렵고, 심오하고, 함부로 하면 안 된다고 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알 바 아니다. 몸쓰는 법을 제대로 배우기 어려운 시대에, 글은 접근과 사용이 가장 쉬운 표현 양식이다. 쉬운 표현 수단을 갖는다는 것은, 살면서 겪는 어려움을 덜고 더 인간답게 사는 데에 확실히 도움이 된다.

글쓰기의 두 번째 이점은 해킹수단으로서의 가능성이다. 해킹이란 주어진 상황이나 문제에 대한 통상적인 접근을 배제하고, 창조적 파괴를 가능케하는 최적의 경로나 방법을 찾아 실행에 옮기는 과정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어떤 분야를 해킹하면,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예를 들어 곡물재배는 지구상에서 호모 사피엔스 종의 획기적인 도약을 가능케한 생태계 해킹이었다. 그 이전에는 먹을 것이 있는 곳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고, 이를 위해 인간은 보통 하루에 20킬로미터 정도를 돌아다녔다. 하지만 농업 혁명의 시작으로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그 이후 1만 년의 역사 시대와 그 이전 100만 년 유인원의 선사시대 차이는 모두가 아는 바대로다.

해킹의 사례를 길게 늘어놓는 것은 내게는 즐거운 일이지만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는 지루한 일이므로, 글쓰기가 무엇을 어떻게 해킹하는지 설명할 차례다. 글쓰기는 의식을 해킹하는 효과적인 도구다. 예를 들어,

아이언 맨이 날아다닌다.

라는 문장은 겨우 세 단어에 불과하지만, 이 문장을 읽은 사람들의 머릿 속에서는 굉장한 스펙터클이 펼쳐진다. 이 문장은 적어도 이 글을 읽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그게 무슨 뜻인지 알만한, 지극히 평범한 어휘로 이루어진 내용이다. 하지만 이 세 단어로 나는 적어도 이것을 읽은 사람들의 의식을 5초에서 10초 정도 사로잡을 수 있다.

누군가의 의식을 5초에서 10초 사로잡는다면, 그 이후에 더 긴 시간을 사로잡는 것은 훨씬 쉬운 일이 된다. 글쓰기가 의식을 해킹하는 것은 이런 식이다. 실제로 당신이 이 글을 읽은지 3분 쯤 지났다.

글쓰기는 사람들에게 매우 쉽게 무언가를 보여줄 수 있고, 글쓰는 사람의 의도를 전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움직이게 만드는 강력한 도구다. 그 힘이 너무 강력했기 때문에, 진나라의 시황제는 맘에 들지 않는 유학자들을 그들의 책과 같이 묻어버렸다. 지구상 대부분의 세계에서 이제 ‘금서’라는 말은 다소 우스꽝스럽게 들리지만, 글쓰기의 해킹 능력은 여전히 강력하다. 예를 들어 새로운 ‘시’ 황제는 중국의 인터넷에서 “광복홍콩”(홍콩 독립) 네 글자가 유통되지 못하도록 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물론 글쓰기가 가장 효과적인 의식 해킹 도구는 아닐 것이다. 사람들이 점점 더 책이나 긴 글을 멀리하는 것처럼 보이는 요즘 시대에는 더 그렇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이미지나 영상을 만드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글쓰기의 첫 번째 이점과 관련이 있다. 즉 접근하고 사용하기 쉽다는 점 덕분에, 사람들을 모으고 움직이고, 그래서 사회적인 변화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에게 글쓰기는 여전히 꽤 쓸만한 도구인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사용하기 쉬운 표현수단인 글쓰기로 다른 사람들의 의식을 해킹하는 데에 관심이 있을까?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해킹 수단 이야기는 왜 했을까?

물론 나는 인간의 의식을 해킹하는 일에 관심이 있다. 의식은 끊이지 않는 감정의 흐름이다. 그것은 잠잠한 동안에도 너무나 강렬하다. 그것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으로,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것의 핵심, 또는 그 자체일 것이다.

결국 내가 글쓰기를 통해 해킹하고자 하는 것은 다른 누군가의 의식이 아니다. 바로 나의 의식, 나의 삶이다. 내 삶을 해킹하는 수단으로써, 나는 글쓰기를 사용한다.

나는 글을 쓰면서 내 의식을 새롭게 다시 쓴다.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는 것도 물론 좋은 방법이지만, 그 순간 내 의식의 흐름은 다른 누군가의 작품 세계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좋은 영화나 책을 보는 것은 물론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글을 쓰는 동안, 나는 내 의식을 스스로 조형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일에 더 관심이 있다.

나는 유튜브에 올릴 영상을 만든 적이 여러 번 있다. 하지만 그 동안에는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고 느끼기 어려웠다. 적어도 글을 쓰는 순간과 그 작업을 비교한다면 말이다.

나는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이 훨씬 더 훌륭한 해킹 도구라는 것을 순순히 인정한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것들에 익숙하지 못하다. 그래서 글을 쓸 뿐이다. 살면서 스스로의 의식을 조망하고, 그것에 접근하고, 조형할 수 있는 기회는 손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글쓰기를 통해서 더디지만 조금씩 그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내게는 늘 놀랍고 설레는 일이다. 나는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던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이것을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내 삶 그 자체인 의식의 세계 즉 감각, 지식, 정서를 해킹하고, 스스로 변화해가기 위해서 오늘도 글을 쓴다. 이 변화는 글을 쓰면서 마주하는, 악의가 없는 날카로운 말들을 상쇄하고도 남는 커다란 보상이다.

이 작업에 기꺼이 동참해주시는 당신께도 내 글이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